죽음을 해결해주소서!라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
스페인이 1469년 카스티야-아라곤 통합으로 국체를 세우기 시작할 때 포르투갈은 항해왕 엔히크(1394-1460)의 주도하에 막강한 해상력을 키워놓고 있었다.6척의 배에 약 4백 명 인원을 싣고 온 비야로보스는 필리핀이란 이름을 붙인 장본인이었으나 정착에 실패하고 포르투갈인에게 체포되어 감금 상태에서 죽었다.
아메리카 발견으로 기세가 오른 스페인의 요구에 따라 전보다는 대등한 조건의 조약으로 바꾼 것이다.윌리엄 번스틴은 〈교역의 세계사 A Splendid Exchange〉(2008)에서 마젤란의 사촌(친구일 수도 있음) 프란치스코 세랑이 마젤란의 활동에 중요한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1527년에 멕시코에서 떠난 또 하나의 함대도 비슷한 결과를 맞았다.
1565년 2월 필리핀 도착 후 세부섬의 새 기지가 안정된 후 우르다네타는 배 한 척으로 회항로에 나섰다.중국 배(La Nao de China)라는 별명이 그 역할을 보여준다.
그의 업적은 정확히 말한다면 세계일주가 아니라 태평양항로 개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508~1568)는 이 기간에 (1525-1536) 일지와 해도 등 많은 자료를 작성했는데 대부분을 포르투갈 측에 압수당했으나 그 자신이 그 방면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되어 스페인 해상활동의 브레인이 되었다.학문이 조심성 없이 현실에 발을 내딛는 건 무모하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조선인 독립군과 싸웠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이날 독립기념관은 ″김형석 신임 관장이 오는 15일 열리는 정부 주최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석하기로 해 자체적으로 열어왔던 광복절 경축식 개최는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안익태가 음악가로서 만주국 건국을 축하하는 곡을 짓고 지휘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족 반역자가 되는가.이종찬 광복회장의 과잉 반응까지 얽히며 기이한 광복절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