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위키피디아] 7~8세기에 류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커지던 상황이 『일본서기(日本書紀)』(720)와 『속일본기(続日本紀)』(797)에 나타나 있다.
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때가 타이완보다 빠른 까닭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아직 못 봤다.7~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류구의 존재는 7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 알려졌다.
언어 다음으로 남양문명이 널리 공유한 요소는 항해술이다.황금알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이름도 중국식인 정동(鄭迵)으로 전해진다.
타이완을 ‘소(小)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류구국은 일본보다 중국과 가까웠다.
류구국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정벌 후 일본 측의 조치가 말해준다.로저 블렌치가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지도』(2009)에서 추정하는 이 어족의 최대 확장기 분포 지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안지대가 많이 들어 있었다.
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이 어족이 타이완으로부터 확산해 나간 것이라면.